독립운동가 성암 장윤덕

예천e희망뉴스l승인2015.04.0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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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성암(惺菴) 장윤덕(張胤德)

*공적개요*

성 명 : 성암(惺菴) 장윤덕(張胤德), 예천
생몰연도 : 1872~1907
주요공적

- 1907년 이토오히로부미 등 매국대신 처단 시도
- 1907년 의병대장으로 활약
- 1907년 일경분파소 등 경찰대, 수비대 격퇴

훈 격 : 건국훈장 독립장

*공적 설명*

장윤덕(張胤德, 1872. 7. 6 - 1907. 9. 16)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이며, 아버지 장재안(張載安)과 어머니 평해황씨 사이에서 1872년(고종 9) 7월 6일 태어났다. 아버지 장재안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 조부는 장종임(張宗任)이고 외조부는 황동전(黃動銓)이다.

장윤덕은 어려서부터 기품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굳고 담력이 컸다. 애국심 또한 투철하여 항상 국가의 쇠퇴함을 개탄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아버지 장재안이 그를 일찍이 보문사에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는데, 보문사에서 3년간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매일같이 강물을 건너와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등 국권이 송두리째 무너져가자 수서기직을 그만두고, 국민들에게 항일 구국 정신을 강조하며, 친일 반역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등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7년 이토(伊藤博文)를 비롯한 일제 고관들과 매국노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을 구실로, 7월 19일 고종이 강제로 쫓겨나고, 8월 1일에는 군대마저 강제 해산을 당하자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이 격화되어 일어났다. 이 때 영춘(永春)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키자, 장윤덕도 각지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 의진에 합류했다. 그는 이강년 의병과 합세하여 의병장으로서 풍기·봉화·문경·용궁·예천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 헌병분파소ㆍ일본 군사기지ㆍ일본 경찰분서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소각하거나 순검ㆍ경찰보조원 또는 친일 행위자 등을 처단하였다.

1907년 7월 9일 일본 경찰 나가타니(永谷) 경시(警視)가 이끄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인 경찰 보조원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가옥과 가산을 불태웠다. 다음달 8월 27일에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풍기에 있는 일경분파소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 야마자키(山崎)를 처단하고 풍기읍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 아오미즈(靑水源三) 등 3인이 도주하자 건물을 불태웠다. 그 후 9월 3일에는 문경읍으로 나아가 일본인 우편물 집배원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 가옥을 불태웠다. 이어서 예천 용궁을 공격하자 용궁분파소의 한인 및 일인 경찰 2명이 도주하였다. 이리하여 이 일대는 의병이 장악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곧 일본군의 반격이 있었다.

이강년 부대가 문경을 장악하자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에게 명령하여 제14연대장 기쿠치(菊地主殿) 대좌(大佐)에게 보병 제14연대를 주력으로, 보병 제47연대의 대부분과 기병 반소대, 산포병 1대, 공병 약간을 이끌고 문경, 예천 일대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토벌대는 모두 5종대로 편성되었는데, 제2종대가 안동을 거쳐 예천으로 파견되었다. 이노자와(井澤) 소좌(少佐)가 이끄는 제2종대는 장윤덕부대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윤덕부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함으로써 약간의 피해만 입었다.

1907년 9월 10일에는 이강년·민긍호 연합부대에 합세하여 1,000여 명의 의병으로 문경 갈평리에서 일본경찰대 및 일본군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했다. 이를 갈평전투(葛坪戰鬪)라고 말한다. 함창에서 점촌을 지나 문경 새재를 넘는 중턱에 마고성이라는 요새가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20리에 문경읍이 있고, 문경의 오른 쪽 골짜기로 40리 들어가면 충주,단양,예천으로 통하는 세칭 ‘갈벌’이라 하는 갈평이 있다. 여기서 장윤덕은 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강년,민긍호 부대와 함께, 나가타니(永谷) 경시(警視)와 미하라(三源) 소위(少尉)가 이끄는 일본경찰대 및 일본군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초전에는 민긍호,장윤덕부대가 유리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세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불리해졌다.

이때 이강년은 갈평에서 포성이 크게 일어나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이동하였다. 백남규,하한서,권용일,이만원 등으로 하여금 갈평을 완전 포위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때마침 일본군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차에 맹렬하게 공격을 하니 일본군 수비대는 허겁지겁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의 시체가 즐비하였을 정도로 의병부대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의병들은 노획한 무기로 진영을 재정비한 후, 이강년 의병장은 300명을 이끌고 충북으로, 민긍호 의병장은 300명을 이끌고 강원도로, 장윤덕 의병장 역시 300명을 이끌고 상주를 거쳐 낙동강을 따라 대구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1907년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여 일본인 가옥과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이어서 대구수비대를 격파할 목적으로 상주읍을 공격하여 저항하는 일본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였으나, 다나카(田中) 대위(大尉)가 이끄는 대구수비대 1개 중대가 진격해 옴으로서 장윤덕부대는 격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은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장윤덕은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여 강도 너희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며, 너희 놈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고 하여 일경을 크게 꾸짖고, 갖은 악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앞니로 혀를 끊어 끝내 함구로 저항하였다.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에서 총살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5세였다.

일본군 수비대가 장윤덕 의병장의 집을 불태우는 등 탄압이 극심해지자, 부인 함녕김씨(咸寧金氏)는 어린 두 아들 시환(時煥)과 인환(寅煥)을 데리고, 낮에는 보문면 수계리 산속 토굴에서 지내고 밤에는 논, 밭으로 다니며 보리와 벼이삭으로 연명하였다. 부인은 공교롭게도 1942년 장윤덕 의병장의 순국 35주년 되던 기일(忌日) 날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장윤덕 의병장의 묘지는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에 위치하는 보문사(普門寺) 근처에 있다. 보문사에서 약 500여 미터 떨어져서 오른쪽 밭으로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들어가 산허리를 돌아 밭이 있고, 그 너머의 산자락 끝에 묘역이 있다. 묘비는 장윤덕의사 기념사업회에서 1967년 9월 16일 장윤덕 의병장 서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세웠는데, 묘비 전면에는 “義兵大將惺菴張胤德先生之墓(의병대장성암장윤덕선생지묘)”라 적혀있다.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그리고 묘갈명(墓碣銘)은 김인(金仁) 경상북도지사가 지은 것이다. 장윤덕 의병장 묘갈명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사직(社稷)이 무너질 제 일천년 의병 몰아
왜적을 무찔다가 의혈(義血) 뿌리시니
의혈(義血) 영켜 반석(盤石) 되고 반석(盤石) 위에 나라 섰네.
이제사 비 바람친다 쓰러지리,
임이여! 원한(怨恨)의 두 눈 감으옵소서.'

광복 20주년이 되던 1965년 10월 30일 장윤덕의사 기념사업회에서는 대구시 산격동 경북대학교 캠퍼스 안에 큰 규모의 돌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맨 위에 세로로 크게 “장윤덕의사순국기념비(張胤德義士殉國紀念碑)”라 음각으로 새겨 넣었고, 그 아래 기념비 비문이 역시 작게 음각되어 있다. 위의 글자는 장의병장의 동생 장윤강이 썼고, 아래 기념비문은 배학보가 짓고 최원봉이 썼다고 적고 있다. 왜 하필이면 기념비를 대학교 안에 세웠는지를 비문은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조국이 광복된 지 스무 해 되는 오늘 나라의 기둥 될 준재들이 모인 이곳 경북대학교 뜰에 드높이 돌을 세우고 의로운 사적을 새겨 이 땅의 젊은 학도들에게 길이 전하니 후진들은 명심할지어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유공자공훈록(獨立有功者功勳錄)』1, 국가보훈처, 1986.
구자일, 「한말 예천 의병전쟁」, 『안동사학』6, 안동사학회, 2001.
김시우편, 『예천의 독립운동사』, 예천문화원, 2010.
권대웅ㆍ권영배, 『경북독립운동사』Ⅰ, 경상북도, 2012.
묘갈명(墓碣銘)
기념비문(紀念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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