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선구자 별동 윤상

예천e희망뉴스l승인2015.05.0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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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상의 어릴적 이름은 철(哲), 20살 관례를 치른 후 동기간에 불렸던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이다. 윤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명민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8~9세 때 공부에 힘써 밤낮으로 글을 외우고 익혔다.

 어려서 향리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관솔불을 모아 밤늦게까지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관아의 군수였던 당대의 대유학자 조용이 그의 명민함을 눈여겨보고는 그를 제자로 삼았으며, 그는 이때 사서육경과 성리서(성리학 책자)를 연구했다.

 그의 학문적 바탕은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윤상은 태조 1년(1392)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고 태조 5년(139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선산의 교수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예(司藝,성균관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정사품 벼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를 위해 외직을 청해 금산과 영주, 대구 등지의 수령을 역임했으며, 대사성에 뽑혀 16년이나 성균관 관장으로 지냈다.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성리학으로 당시의 주종이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특히 그는 세종 30년(1448)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성균관박사가 돼 단종에게 학문을 가르쳐 사림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당시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는 김구, 김말, 김반 보다 더욱 뛰어나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우기를 청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개국 이래 으뜸가는 사범(師範)이라 불려 진 것은 오랫동안 교편을 잡으며, 현관(顯官)·명사(名士)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문종 원년(1451) 고향으로 돌아왔을 당시 나라에서는 예천군수로 하여금 음식을 매달 바치게 했다.

 그의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지금은 헐어서 치워 버린 예천의 향현사(鄕賢祠)에 모셔졌다.

 윤상의 학문은 후대에 이르러 당대의 경학자이자 대문장으로 일컬어진 서거정과 김종직, 성현, 이황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조선 초기 대학자 별동 윤상 선생의 불천위(나라에 큰 공훈을 세워 영원히 사당에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한 신위) 사당인 도유형문화재 제 293호 윤별동묘가 있다.

 예천군 보문면 소재지인 이곳은 내성천이 마을 앞을 둘러 눈썹처럼 되어 있다하여 미호리(眉湖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초기 대학자 별동(別洞) 윤상(尹祥:1373~1455)이 벼슬에서 물러나 터를 잡은 곳으로, 현재 예천 윤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어릴적 예천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머물렀던 다산 정약용은 예천을 일러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했다.

 곧, 예천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처럼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했던 곳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은 대제학을 지낸 송정(松亭) 조용(趙庸 ?~1424)과 그의 제자이면서 대제학을 지낸 별동 윤상 등이 후학을 양성했던 유학의 태동지이자 모태지다.

 이러한 고을 풍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수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 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5백년 동안 전국의 문과급제자는 9천30명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예천이 44명, 용궁 18명으로 모두 62명이다.

 이는 경주 52명, 밀양 32명, 대구 27명, 영해 14명 등에 비해 많이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학풍은 인근 영주·안동에 이어져 초기 유학을 전파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실제로 명종 22년(1567) 가을, 중국의 사신으로 온 서국(徐國)과 위시량(魏時亮)은 "동방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아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자 퇴계 이황은 고려의 우탁, 정몽주와 조선의 김굉필, 정여창, 윤상, 이언적, 서경덕의 7인을 적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별동 윤상은 조선조 경학에 조예가 깊었던 성리학의 선구자였으며, 경북 북부지역 초기 성리학적 학풍을 조성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초라한 사당만이 미호리에 자리해, 옛 선현의 가르침을 어렴풋이 기억하게 끔 하고 있다.

 '예천군지'에는 윤상의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옛 무덤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윤상의 아버지는 무덤 주인이 학 한 마리를 주는 태몽을 꾸고 윤상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학은 조선조 문인의 흉배에 수놓아져 있는 것으로 문인을 뜻하는데 윤상은 문인으로 대성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현재 윤상을 제향하고 있는 윤별동묘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으로 1456년(세조 2)에 건립했다.

 이 사당에는 별동 윤상과 그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안동(安東) 전씨(全氏)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8일 미호리의 예천 윤씨 종가에서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막돌초석 위 어칸에는 둥근기둥을, 양쪽 칸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또 어칸은 창방을 높이고 양쪽 칸은 창방을 낮게 처리했으며, 어칸에만 두 짝의 열개문을 달고 양쪽 칸에는 빛이 통과할 수 있는 광창만 두는 오래된 구성법을 보여 사당 건축에서는 흔하지 않은 구조와 양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구는 삼량가인데, 양측 귀기둥 위에는 창방머리를 다듬어서 길게 빼고 위에는 주심을 십자로 짜서 얹는 등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외벽은 외부 배면만을 제외하고는 내외부를 모두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사당 내에는 별동집 목판이 보관돼 왔으나 훼손이나 분실, 도난 등의 예방을 위해 안동 국학진흥원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이 윤별동 묘는 옛 조선조 초기 성리학자인 별동 윤상을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건축문화재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미호리 동쪽 등성이에 위치한 정자는 산이 수려하고 앞에는 내성천의 맑은 물이 흘러서, 이 정자에 오르면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이 쾌락하여 윤상이 지었다고 하는 청심대(淸心台)가 있다.

 ■ 별동 윤상이 실제 주인공인 '진주 삼킨 거위' 구한 선비이야기

 별동 선생이 길손이 되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었는데 주막에 앉아 밖을 보니 주인의 손자로 보이는 대여섯살난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들고 대문 밖을 나가다가 그만 구슬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그때 마침 아이의 옆에서 먹이를 찾던 거위가 구슬이 먹이 인 줄 알고 집어 삼키고 말았답니다.

 한참 후 주막 주인은 별동 선생을 의심하며 밧줄로 꽁꽁 묶어 관가에 끌고 가려 했는데 별동은 태연히 저기 있는 거위를 멀리 못 가도록 묶어 나와 같이 있게 하면 내일 아침 구슬을 틀림없이 찾을 것이라 주인에게 사정했다.

 이튿날, 별동 옆에 다리가 묶인 거위가 똥을 누자 별동은 주인에게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을 찾으라고 했다지요.

 구슬을 찾은 주인은 백배 사과하고 거위가 구슬을 먹은 줄 알면서 왜 말을 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고생하였냐고 묻자 "구슬을 당장 찾기 위해 거위를 죽였을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요."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침착성과 참을성을 갖고 모든 일을 처리한 탓에 후에 별동은 높은 벼슬과 큰 학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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